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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복수에 대한 거침없는 감독의 질문 - 복수는 나의 것

검이불루 2015. 1. 24.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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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사적인 복수에 대한 박찬욱의 유쾌한 도발. 규율, 규범, 규제, 규칙 등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규'는 컴퍼스로 그려놓은 원을 의미한다. 박찬욱은 이 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 것은 아닐까?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중에서 1부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영화를 떠나서, 이 영화를 통하여 신하균이라는 배우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다지 손해 본 느낌은 없다. 

청각장애인, 장기밀매, 아동납치,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 냉소주의적 무정부주의자, 여러 부류의 루져들이 모여서 그들만의 리그를 벌인다. 과연 영화 속에서 배두나가 주장했던, 착한 아동납치라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반문해 보지만, 뭐 그런 것은 차치하고라도, 순간순간 문득문득 보이는 섬뜩함은 가뜩이나 무거운 주제와 결합하여 굉장한 인내심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상당히 거부감에 들게 한다. 

전작에 비하여 엄청난 혹평과 함께, 모두가 월드컵의 광기에 취해있을 무렵 여자친구와 가볍게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러 갔던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손가락 발가락 심지어 X꼬에 까지 팍팍 힘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편함이 감독의 의도였더라면, 뭐 제대로 성공한 영화이지 싶기도 하다. 뭐 이러한 하드보일드 영화가 개인적인 취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에 나름 만족할만한 영화로 기억이 된다. 

영화를 볼 때, 그 줄거리나 주제보다는 인물에 몰입하여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겐 10년이 넘게 지난 이 영화의 어렴풋한 기억의 조각은 전체적인 대강의 줄거리와 신하균의 녹색염색이 잘 어울렸던 머리, 그리고 배두나의 유두뿐이다. 

 그리고 복마전처럼 엮여서 서로에게 가해지는 심각한 사회적 폭력. 전지적 관점의 영화적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납득이해 가능하지만, 사회적 관전에서 보자면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또한, 용납되어선 안될 개인 간의 사적인 복수를 다른 사람들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 사회의 규범, 규칙, 규율 모두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규"의 어원은 요즘의 컴퍼스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원을 그려놓고 그 원에서 벗어나지 말아라고 하는 협박에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어원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규범, 규칙, 규율을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가치판단의 기준이라 가르치고 있다. 

왜 이러한 말이 생겨났는지 어원과 함께, 사회적 규범, 규칙, 규율이란 우리 모두의 합의하에합의로 이러한 원은 벗어나지 말자고 서로 약속한 내용들이라 교육하면 안 되는 걸까? "

이원은 넘지 마. 여러 사람의 약속이야!" 
이렇게 이해시키는 것과, 
"이건 당연히 따라야 하는 강제적인 내용이다. 무조건 지켜. " 
이렇게 이해시키는 것. 

내용적으론 비슷할지 몰라도, 주인의식의 문제에서 커다란 차이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혹시, 박찬욱 감독은 우리가 그려놓은 그 원의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유야 어찌 됐든, 영화를 보고 난 후,


나 : 영화 어땠어? 

 x걸프랜드 : 너무 비린내 나서 싫어!

그렇다. 내가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려 했던, 그 알 수 없는 거북함과 혐오감은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린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린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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