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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혼인보(본인방)의 인연..그리고 조훈현..이창호

검이불루 2015. 1. 17.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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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유신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기린아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한 후, 메이지유신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걷게된걷게 된 바둑계의 거장 혼인보 슈에이와 절친한 친구사이가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1884년 인천에서 배를타고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난 뒤 절해고도 오가사와라 제도로 유배된 때가 1886년이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본 바둑계의 최대 문파 혼인보의 수장 슈에이는 이미 김옥균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본토에서 1,000킬로 미터나 떨어진 유배지에서 3개월을 지내며 김옥균과 바둑을 두었던 점이나 김옥균이 홋카이도로 옮겨질 때, 아쉬움에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따라서 홋카이도까지 간 일 등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친구 이상의 교류를 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각자에게 다른 방식의 아픔을 안겨주었던 명치유신(메이지 유신)이 그 영향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옥균의 매력적인 인품을 꼽을 수 있다.


10여 년의 일본망명 생활 이었지만, 김옥균이 상해에서 자객 홍종호에게 죽임을 당한 뒤 그의 위패를 모시겠다고 나선 여인만 7명이었다고 전해진다.


더구나 김옥균은 교류를 넘어 혼인보의 후계문제에도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사실상 몰락해가는 일본 바둑의 수장 혼인보의 신진고수이자 훗날 마지막 세습 혼인보에 오르는 슈사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유학길에 오르려 할 때 김옥균은 슈사이를 설득하여 혼인보로 되돌려보냈다고 알려졌다. (물론 혼인보의 몰락에는 알려지지 않은 아주 많은 일화가 있다. 언제 한번 정리해서 글로 올리도록 하겠다.)


이러한 김옥균의 노력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슈사이 이후, 일본바둑의 실질적인 수장이던 세고에 겐사쿠는 조훈현을 받아들이게 되고 훗날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이면서 굳건하던 일본바둑의 기세는 고스란히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다.


거기에 은퇴 전에 혼인보의 사용을 이미 허락받은 조치훈을 비롯하여 조선진 등 혼인보와 한국과의 인연은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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