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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시작을 만들어낸 좌원전투

검이불루 2014. 11. 2.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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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유비, 관우, 장비는 잘 알고, 적벽대전은 알아도 명림답부와 좌원전투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한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고구려의 재상 명림답부가 십상시가 보낸 10만대군을 좌원에서 섬멸하는 바람에 중국은 근 400년동안 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유명한 삼국시대의 도래가 시작되었습니다.


개판오분전의 동한을 접수한 그 위세도 당당한 조절과 그 일당(십상시라 불리우던..)은 민심을 수습할 요량으로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고구려와의 작은 전투에서 승리의 경험도 있고했던 경림이라는 현도군 태수에게 10만의 군사를 내어주며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명함니다.


이에 고구려는 결전을 할 결심과 함께,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며, 장기전에 지쳐 돌아가던 경림의 10만대군을 좌원이라는 곳에서 섬멸을 하게 됩니다.


이후, 중국은 400년간 대 혼란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러한 중요한 좌원전투는 후한서나 삼국지에는 단 한줄도 기록되지 못합니다. 춘추필법의 무시무시함은 여기에서 나오죠....


이후, 동한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며, 공손탁이 요동에서 독립을 해버리게 되었고, 각지에서 각종 다양한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반란이 장각이 이끌던 황건적의 난 입니다. 황건적의 위세가 대단했던 것도 있지만, 한 나라의 정규군이 좌원전투에서 궤멸되는 바람에 황건적에게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던 점도 크다 하겠습니다.


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황건적의 난도 장각의 죽음과 함께, 내부 권력다툼에 의한 분열로 자멸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후, 명색이 대장군이라는 하진은 나라를 바로잡고자 십상시를 비롯한 무리들을 정리하려 했으나, 그들을 칠 군대가 없어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되고, 서량의 군벌인 동탁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삼국시대느 시작되었고...우리는 그 드라마틱한 내용에 열광하고 있는 겁니다. 좌원전투는 잊은채로....


 - < 첨부> -


사건을의 연결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대략 연대를 구술 합니다.

좌원대첩이 172년이 일어나고, 십상시들이 난을 일으켜서 마지막 발악을 하다 죽은 시기가 189년 입니다. 흔히들 십상시의 난이라 불리우지요.

13세때인 168년 영제가 제위에 오르고 십상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됩니다.

장각이 170년대 초부터 무리들을 조금씩 규합하여 황건의 난을 일으키니 그 난리는 잔당들의 발원까지 포함하여 194년에 섬멸됐습니다.

170년 초부터 못살겠다고 장각이 무리를 규합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미 160년대부터 후한은 개판 오분전이라 보는 것이 맞습니다.

여기에 어줍잖은 잔머리로, 그나마 남아있던 정규군 10만을 172년 좌원대첩에서 깨끗하게 말아먹게 됩니다.(그당시 십상시의 재가가 없이 타국과의 전투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면 사관에 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즉 현토태수 경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뒷선이 중요하지요...) 결국 이 전쟁은 십상시가 일으킨 겁니다. 역사서에는 말한마리 돌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상태에서 굻어죽게 생겼다면서 봉기한 황건을 정규군이 궤멸당한 후한이나 십상시가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 비리비리한 영제가 곧 뒈질정도로 병이 깊어지자, 십상시와 하태후,하진 두축은 서로 엮이고 엮여 권력쟁취를 위한 피나는 싸움을 하게됩니다. 뭐 여기부터는 삼국연의의 내용이니...

결국, 서량군벌 동탁(그 당시의 서량출신이면 중궈의 모습이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이 모든걸 평정하고 천하대권을 쥐면서 중궈는 400년의 피비린내 나는 시소게임에 돌입하게 되는 겁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어줍잖게 고구려만 토벌하러 가지 않았어도,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었겠지요.....

이 좌원대첩을 계기로 고구려,신라,백제는 대륙으로부터 좀 자유로질 수 있었을 겁니다. 지 살기도 바쁜 와중에 고구려에 감놔라 대추놔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럴 깜냥도 없었을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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