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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꿈이 녹아있는 군산의 일본식 절 - 동국사

검이불루 2015. 9. 1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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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미곡수탈의 전진기지였던 군산에는 일제의 많은 잔재가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동국사는 꽤나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요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통 일본식 사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절은 세계적인 시인 고은의 젊은시절의 추억이 서린 장소이기도 하다.

군산에 위치한 동국사는 1906년 일본승려 우찌다가 일본에서 직접 목재를 공수해와 만든 순 일본식 사찰 입니다. 광복과 함께 원래의 이름이던 금강선사를 동국사로 바꾸게 됩니다.


동국사는 한일병합 1년 전, 1909년 6월 일본 조동종 승려 우찌다 스님이 일조통에서 금강선사란 이름으로 포교소를 개창하고, 1913년 현 위치로 옮겨와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55년 (재)불교전북교당에서 인수하고 당시 전북종무원장 김남곡 스님(1913~1983)이 동국사로 개명하고, 1970년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 정방형 단층팔자지붕 홑처마 양식의 에도 시대 건축양식으로 외관이 화려하지 않으며 소박한 느낌을 준다. 지붕물매는 75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건물외벽에는 미서기문이 많으며, 용마루는 일직선으로 전통한옥과는 대조를 이룬다. 요사는 몸채를 퇴간으로 둘러싸는 일본 전통양식이고, 복도를 통해 법당과 요사가 연결되어 있다. - 위키피디아

군산이 고향인 고은(고은태)은 육이오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실상을 목격한 후,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치고 군산북중에서 미술 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국사에 자주 다니던 고은은 동국사 주지 혜초 스님의 설법에 감동하여 중이 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수개월의 행자 생활을 거쳐 고은은 '중장'이라는 법명을 받고 정식 스님이 됩니다.


전에 고은을 만나 담소를 나눴던 기억을 가지고 있던 토요동인회 창립자인 송기원은 어느 날 문득 고은이 궁금하여 수소문 끝에 고은이 있던 동국사로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송기원은 고은에게 시를 쓸 것을 권하며 토요동인회의 가입을 권유하게 됩니다. 망설이던 고은은 결국 토요동인회에 가입하고 정식으로 시를 쓰게 됩니다.


아래는 고 최영시인이 수많은 취재를 통하여 기록한 고은과 동국사의 인연, 그리고 고은이 시인이 될 결심을 하게된 내용 입니다.


송기원이 토요동인회를 결성한 얼마 후였습니다. 교장 이종록의 천거로 북중학교 교사가 되었던 고은태는 전쟁의 상흔으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군산에 피난 와 택시 4대를 가지고 중앙택시회사를 경영하고 있던 동요 반달의 작가 윤극영尹克榮을 자주 만났습니다. 

그날도 고은태는 시청 앞 전원다방에서 윤극영을 만났습니다.

고은태가 불교에 대해서 말문을 꺼내자 윤극영은 대뜸 <기독교는 정열의 종교이고 불교는 체념의 종교>라고 단언합니다.

심기가 상한 교사 고은태가 다방을 나오는데 문 앞에서 한 신사와 부딪칩니다. <실례했습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나왔습니다.

수인사를 했지만 헤어지지 못하고 홀린 듯 함께 다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군산전매청 감시과장 송기원이라는 명함을 받습니다.

송기원은 -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요. 폴 발레리의 시를 좋아 하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눈썹이 짙고 속눈썹이 우수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950년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진지 한 달도 못된 7월19일 인민군이 군산 옥구를 장악합니다. 군중 4년생 고은태의 고향 미면 용둔 마을도 인공치하가 되어 철저히 좌우로 갈라졌습니다. 2개월10일 후인 9월29일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미제 뒷산 산병호에서 살육합니다.

눈이 뒤집혀 살아 돌아온 우익들이 좌익들을 할미산에 데리고 가서 보복 살육합니다.

한 마을 일가친척 간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피비린내의 현장에 있었던 고은태는 실성합니다.

그의 우수는 학교에 가지 아니하고 유랑하다가 내항 외국상선에서 군수물자를 푸는 미항만사령부 작업반장(첵커)으로 취직 되었습니다. 자살에 실패하고 회사를 나옵니다. 이종록에 의해 북중학교 미술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 때 송기원을 만났고 시인이 되기 위해 필명을 고은으로 합니다.

그의 번뇌는 북중학교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인 동국사를 자주 다닙니다.

1909년6월 일본인 승려 우찌다가 일본목제를 드려다가 지은 국내유일의 완전한 일본식 사찰 금강선사錦江禪寺가 광복이 되자 이름이 동국사로 바뀌었습니다.

혜초스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구름처럼 많은 대중이 동국사로 몰려왔습니다.

그 중에는 노익래 판사 부부, 상과대학 김성현, 채중묵 교수, 화가 김기창, 박래현 부부, 군산사범학교 교장 최봉칙 등 기독교 신자나 지성인들도 상당히 끼어 있었습니다.

고은은 학교를 그만둔 후 혜초스님에 의해 삭발하고 행자 혜민慧敏이 됩니다.

행자노릇 수개월 후 고은을 불러 중장中藏이라는 법명과 단주短柱, 발우鉢?, 먹물 옷 등도 함께 내립니다.

스님 중장이 된 것입니다.

송기원이 동국사를 찾아왔습니다.

- 스님이 되었다는 소식 진작 들었습니다.

- 들어가시지요.

- 아닙니다.

본당 앞 종루 부근 화단에 서서 두 사람은 대화 했습니다. 화단에는 1953년 겨울 잔설이 아직 녹지 않고 있었습니다.

-요사이 시를 쓰십니까?

송기원이 물었습니다.

-절에 온 후 시 공부를 못 했습니다

고은은 자살기도 전 내항 어딘가에 버린 시작 노트 생각이 났습니다.

- 스님이 시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워요. 말씀言 변에 절寺자가 詩 아닌가요?

- 만해卍海 한용운도 스님이자 시인이었답니다.

고은(中藏)은 卍海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습니다. 온몸이 전류에 휘말린 것 같았습니다.

송기원은 말합니다.

- 실은 얼마 전 정윤봉, 김순근 차칠선 등등이 모여 문학 동인을 만들었습니다. 스님도 참여 하시지요.

- 아! 그래요!

사흘 뒤 스님 중장은 군산전매청에 들러 송기원 과장을 만났습니다.

난롯가에 앉아 한참 담소 끝에 중장(고은)은

-토요동인회에 가입하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송기원은 스님 고은을 데리고 딸기밭으로 유명한 백토리에서 새로 이사하여 살고 있었던 영화동 집에 갔습니다.

어머니와 두 딸이 스님을 향해 합장했습니다.

송기원의 방은 책으로 가득했습니다.

38세의 송기원과 21세의 고은은 술을 마시며 역사, 인생, 철학 그리고 시를 논했습니다.

창밖엔 흰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담겨있는 동국사는 현재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무이의 일본식 사찰입니다. 모든 목재는 일본에서 직접 공수한 쓰기나무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여행기는 아래 블로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152094/130168134914

이곳 종루 앞에서 스무 살 젊은 중 중장(고은)은 송기원과 담소를 나누며 시인이 될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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